측벽이 사랑이 될 때 ,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어떤 영화는 사랑 이야기인 척하면서 사실은 도시 이야기를 한다.

원제 Medianeras에 대하여

2011년 아르헨티나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 그렇다. 이 영화는 탱고도, 정열도, 뜨거운 로맨스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시작하자마자 4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차갑고 제멋대로 솟은 건축물을 응시한다.


벽을 사이에 둔 두 사람

줄거리는 단순하다. 웹디자이너 마틴은 공황과 공포증으로 원룸에 틀어박혀 가상 세계에 숨어 산다. 쇼윈도를 꾸미는 일을 하는 마리아나는 긴 연애를 끝내고 길을 잃은 상태다. 두 사람은 같은 거리, 마주 보는 건물에 산다. 취향도, 상처도,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도 똑 닮았다. 천생연분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갈 때까지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플롯이 아니라 두 주인공의 독백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목소리로, 같은 도시를 이야기한다. 수백만 명이 사는 도시가 어떻게 사람을 단절시키는지. 우리를 이어준다는 수많은 전깃줄과 통신망이 어떻게 오히려 우리를 갈라놓는지. 영화는 별거와 이혼, 우울증, 공황 발작 같은 현대의 병을 제멋대로 지어진 도시 탓으로 돌린다.


원제는 왜 측벽인가

이 영화의 원제는 Medianeras, 우리말로 측벽이다. 왜 로맨스 영화에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 이것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열쇠다.

측벽은 건물과 건물 사이, 옆면에 생기는 벽을 말한다. 도시에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생겨난, 창문도 없고 장식도 없는 맨벽. 영화 속 마리아나의 독백처럼, 측벽은 건물에서 가장 쓸모없는 부분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 기능도 없이, 그저 옆 건물과 맞닿아 있을 뿐인 벽.

이 측벽이 영화 속 인물들의 은유다. 거대한 도시 안에서 서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창 하나 없이 단절된 사람들. 마틴과 마리아나가 바로 그 측벽 같은 존재다. 가까이 있지만 서로를 보지 못하는.

영화의 전환점은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측벽에 창을 내기로 결심하는 순간이다. 불법이든 뭐든, 빛이 들어오게 벽을 뚫는 것. 그것은 곧 단절된 자신에게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구멍을 내는 행위다. 측벽에 창을 낸다는 건축적 행동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소통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사랑에 빠질 확률이 아니라 측벽이어야 했다. 한국어 제목은 관객을 부르기 위한 옷이고, 영화의 진심은 원제에 있다.


스페인어로 듣는 명대사

이 영화의 독백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처럼 쓰여 있다. 그중 마리아나의 독백 한 구절이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

“¿Si aún cuando sé a quién estoy buscando no lo puedo encontrar, cómo voy a encontrar al que estoy buscando si ni siquiera sé cómo es?”

“내가 누구를 찾는지 알면서도 찾지 못하는데,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마리아나는 월리를 찾아라를 곁에 두고 살면서 이렇게 되뇐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단 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의 막막함.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영화를 여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Cómo encontrar el amor cuando no sabes dónde está?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랑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스페인어로 들으면 그 막막함의 질감이 더 생생하다.


음악, 그리고 도시의 소리

영화 음악은 아르헨티나 작곡가 가브리엘 추보이니크(Gabriel Chwojnik)가 맡았다. 요란하지 않고, 도시의 고독을 닮은 담백한 선율이 독백 아래 조용히 깔린다. 음악이 전면에 나서서 감정을 쥐어짜는 대신, 두 사람의 목소리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풍경 뒤에서 은은하게 흐른다. 이 절제가 영화의 차분한 톤을 완성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그 선율과 도시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른다. 음악이 공간의 정서가 되는, 흔치 않은 경우다.


에디터’s 노트

공간을 설계하고 짓는 일을 하다 보면, 건물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깊이 좌우하는지 자주 실감한다. 창이 어디에 나는지, 벽이 어디를 막는지에 따라 그 안에 사는 사람의 하루가 달라진다. 이 영화는 그 당연한 사실을 로맨스의 언어로 말한다. 잘못 지어진 도시가 사람을 외롭게 만들고, 벽에 낸 창 하나가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다고.

측벽은 건물에서 가장 쓸모없는 벽이다. 그러나 그 쓸모없는 벽에 창을 내는 순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벽이 된다. 우리 삶에도 그런 측벽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여겨 방치해 둔 면. 어쩌면 사랑은, 혹은 연결은, 바로 그 벽에 용기 내어 창 하나를 내는 일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가을밤, 혼자 보기 좋은 영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Medianeras / Sidewalls) | 2011
감독·각본: 구스타보 타레토 (Gustavo Taretto) | 95분 | 아르헨티나·독일·스페인 합작
주연: 하비에르 드롤라스 (마틴), 필라르 로페스 데 아얄라 (마리아나)
음악: 가브리엘 추보이니크 (Gabriel Chwojnik)
원제 뜻: Medianeras = 측벽 (건물 사이 창 없는 맨벽, 도시 속 단절의 은유)
키워드: 도시의 고독, 디지털 시대의 단절, 소통의 회복, 건축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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